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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세운 중가주 리들리를 가다] 하와이서 이주 첫 정착…독립운동 발자취 널렸다

지난 13일 오후 2시 LA에서 북쪽으로 220마일 떨어져 있는 중가주 리들리시. 인구 2만명의 소도시인 리들리시에 거주하는 한인은 10여명 남짓하지만 이날 250여 명의 한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들리시는 미주한인이민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이민 선조들의 첫 정착지였으며 해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였다. 바로 이곳에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 제막식이 3시간동안 열렸다. 미주한인이민 역사 107년만에 이민 선조들의 삶과 독립운동 발자취가 느껴지는 생생한 현장의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세상은 변해도 정신은 뚜렷했다. ◆리들시는 미주한인 이민역사 박물관 ‘리들리 독립문’은 웅장했다. 개막되는 순간 애국지사 후손 40여명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리들리 독립문은 1897년 한국에 세워진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14피트 높이로, 한글 현판 '독립문'이 새겨져 있다. 독립문 앞 작은 광장에는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이재수, 김종림, 김호, 한시대, 김형순, 송철, 김용중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가 두 줄로 세워졌다. 비석 앞 뒤로는 사진과 함께 연혁, 애국활동 등이 영문과 한글로 빼곡히 써있다. 이날 애국지사 후손들은 아버지, 할아버지 기념비 앞에서 감격의 소감을 쏟아냈다. 한시대씨 맏딸 루이스 한 박씨와 김용중씨 맏딸 매릴린 김씨의 목소리는 연설 내내 떨렸다.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 건립에 투입된 비용은 25만달러. 그중 리들리시는 부지 및 자금 등 12만달러 이상을 제공했다. 매리 패스트 리들리시 시장은 제막식 연설에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는 미주한인이민사 뿐만 아니라 리들리시 역사의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리들리시 자체가 미주한인이민역사 유물의 보고인 것이다. 독립문과 기념비는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이며 애국지사인 김형순씨 자택 및 ‘김 형제(Kim Brothers) 상회’가 위치했던 인근 공원 163평 부지에 건립됐다. 1955년 건축된 김형순씨 자택, 김형제 상회 노동자들 막사, 김원용씨가 재미 한인 50년사를 집필하고 김호씨가 출판한 김호씨 자택이 독립문과 애국선열 기념비를 둘러싸고 있다. 1마일 거리에 있는 리들리 뮤지엄에는 1903년 고종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 이재수씨에게 발부한 여권(당시 집조라고 불렸음), 1920년 쌀농부 김종림씨가 일본과 싸울 한인전투비행사 양성소 설립했다는 윌로우스 페일리 신문, 1920년 대한민국 국민회가 1920년 발행한 독립기념일 리본 등 미주한인초기이민 역사의 증거들이 보존돼 있다. 뮤지엄 길 건너 버지스 호텔 입구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얼굴과 연혁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2층에는 두 애국지사가 리들리시에 들를때마다 묵었던 방을 프레지던트 룸으로 명명하고 얼굴사진과 독립운동 활동을 설명한 글을 올려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버지스 호텔에서 2마일 거리에는 170여구의 한인 이민선조들의 무덤이 있다. 고종의 이민장려 정책으로 이민와 모욕과 인종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들은 일본 통치로 나라를 잃자 리들리시 및 다뉴바시의 과일농장 노동자로 받은 임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리들리시에 현재 남아있는 한인이민사 유물로는 1938년 한인들이 손수 건립한 리들리 한인장로교회가 남아있다. 히스패닉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을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구입해 미주한인초기이민사박물관으로 바꿀 계획이다. 록키 로저스 리들리시 시티매니저는 “독립문 뒤 수영장을 무상으로 제공해 한인이민사 박물관을 만든다”고 밝혔다. ◆어떻게 추진됐나 1920년 리들리시 인근 다뉴바시에는 3월1일 300여 명이 모였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의 3분의 1이 모였다. 노동자, 인종차별, 나라잃은 것까지 삼중고로 고생한 이민 선조들의 독립활동으로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50%가 조달됐고 조선도 독립을 맞이했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이것에 주목했다. 캘스테이트 프레즈노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차만재 교수가 묻혀 있던 한인이민사를 발굴하게 된 계기는 2003년 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우연히 본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의 수많은 한인 무덤들이었다. 차교수는 이들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리고 언젠가 정체성으로 고민할 이민 후세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를 발족했다. 그후 애국운동 요지였던 다뉴바 애국선조 기념비, 3·1절 행진 기념비,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묵었던 버지스 호텔 기념동판 등 역사적인 유적지를 연구·발굴·보존해왔다. 하와이와 조선에서 온 한인노동자들이 과일수확기에 350여명이 넘었던 다뉴바시 한인장로교회는 독립활동의 본산지였다. 차 교수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주한인 이민선조들의 삶은 곧 한인이민사이면서 우리가 왜 지금 여기 서있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한인 2세들에게도 한인이민사를 전하기 위해 최근 ‘중부 캘리포니아주의 한인들’(Koreans in Central California) <1903-1957>'을 발간했다. ■중가주 주요 유적지 ▶다뉴바시 - 1912년 건축된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자리 기념비 건립 - 이승만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결혼 축하연 열어줬던 존 고씨 자택 - 1920년 3·1절 시가행진 기념해 2008년 세운 기념비 - 애국지사 송철·김용중씨가 설립한 K&S 과일판매업소 포장사업지 - 53인의 이민선조들이 묻혀있는 다뉴바 스미스 마운틴 묘지 ▶리들리시 - 170인의 이민선조들이 묻혀있는 리들리 묘지 - 리들리 김형제상회 노동자 막사 - 김호씨 자택 - 김형순씨 자택 -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이 묵은 버지스 호텔(11th Street, Reedly·사진) - 독립자금 모금장소 리들리한인장로교회(1408 J Street, Reedley) - 독립문 모형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196 N.Reed Ave. Reedly) ▶프레즈노시 핸포드 앤 데라노 - 1907년 임성택이 핸포드에 개업한 첫 한인여관 - 김원택이 1908년 운영했던 프레즈노 한인여관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10-11-19

'리들리시 독립문' 의미는…조국 독립 피땀 흘린 '이민 1세 발자취' 담았다

‘리들리시 독립문’과 애국지사 기념비 건립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민 초창기 1세대 대부분이 1940~50년에 사망한 상황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세워지기까지 미주한인 이민자들의 희생을 간과할 수 없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고종의 이민장려 정책으로 많은 한인들이 이민 왔지만 일본통치로 무국적자가 됐다. 갖가지 모욕과 인종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나라를 잃자 한인들은 리들리시 및 다뉴바시의 과일농장 노동자로 하루 50센트 임금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라고 초기 이민자들의 숭고한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독립문 이면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땀을 흘린 이민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노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독립문 및 애국지사 기념비 제작에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앞장섰다. 한인 후세들에게 이민선조의 역사를 그대로 전해주기 위해 2003년 조직된 연구회는 그동안 이민사 보관 및 기록, 유적지 발굴·보전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다뉴바시 애국선조 애국활동 기념비 건립,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묵었던 버지스 호텔 기념동판 설치, 리들리시 박물관 한인이민사 자료 전시 등을 이끌었다. 리들리시 박물관에는 1903년 고종이 애국지사 이재수 선생에게 발부한 여권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향후 리들리시 지원으로 독립문 뒷쪽 수영장을 박물관으로 전환해 한인이민사 자료를 전시할 계획이다. 또한 1938년 선조들이 손으로 세운 리들리한인장로교회 재구입을 위해 기금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정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는 “리들리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가 한인이민사의 정신적인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많은 한인들이 이곳을 방문해 한인 이민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10-11-14

해외 독립자금 조성 중심지 중가주 리들리시에 '독립문'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이민자들의 첫 정착지였으며 해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였던 중가주 리들리시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13일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주최로 열린 독립문 제막식에는 이정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와 매리 패스트 리들리 시장, 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 가족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공개된 ‘리들리 독립문’은 한국에 있는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14피트 높이로, 한글 현판 '독립문'이 새겨져 한인이민역사의 상징물이 됐다. 이날 또 독립문 앞 광장에 안창호, 이승만, 김호, 김형순, 김종림, 김용중, 이재수, 윤병구 선생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기념비에는 영문과 한글로 애국 활동과 연혁이 새겨졌다. 독립문과 기념비는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이며 애국지사인 김형순씨 자택 및 ‘김 형제(Kim Brothers) 상회’가 위치했던 인근 공원 163평 부지에 건립됐으며 역사회 및 한인 커뮤니티 4만달러, 국가보훈처 9만달러, 리들리시 10만달러 등 총 23만달러가 투입됐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독립문과 애국지사 기념비는 초기 한인이민사와 리들리시 발전사의 생생한 현장”이라며 “이곳을 방문한 한인들이 과거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호 선생 아들 안필영(영어명 필립 안)씨는 “초기 이민 선조들은 피땀흘려 번 돈을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한국 독립이 가능했던 이유가 오늘 이렇게 독립문이라는 상징물로 우뚝 세워져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향후 유적지 3곳에 기념비 추가 건립 및 박물관도 세울 계획이다. 이은영 기자eyoung@koreadaily.com

201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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